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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여행

전라남도 해남군 남파랑길(해남, 강진 구간) 힐링코스

오늘도여행



 ‘남파랑길’은 부산광역시 오륙도에서 전라남도 해남군 땅 끝까지 이어지는 1,470㎞의 국내 최장 거리 탐방로다. 그 중 해남, 강진 구간은 땅 끝 해남에서 남도 답사 1번지 강진으로 가는 코스이다. 해남 땅끝 탑, 신비하고 아름다운 미황사, 기암괴석에 가려진 작은 암자 도솔암에서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볼 수 있다. 자연에 한껏 취해본 후,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 윤씨 녹우당을 지나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에 올라갈 수 있다. 숲 길을 찾고 싶은 날엔, 강진만 생태공원의‘갈대 숲길’, 호남의 3대 정원인 백운동 원림의 '대나무 숲길'을 걸어볼 수도 있다.


(공공데이터포털, 한국관광공사의 공공데이터를 이용하여 여행코스, 축제 정보등을 제공합니다.)
    • 코스총거리 : 62.2km
    • 코스일정 : 3박이상
    • 코스총소요시간 : 3박4일
    • 코스테마 : ----지자체-----

    주변 볼거리

    SNS.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6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 직접 병풍바위에「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백운동원림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聃老, 1627~1701)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영(造營)한 원림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별서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월출산 능선의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보이는 이곳에 전형적인 호남전통원림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마침 이곳길도 해남부터 시작하는 삼남길이 지나는 길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다산선생이 1812년 이곳을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 를 그리게 하고 백운동 원림의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는데 이를 근거로 호남의 유서깊은 전통별서의 모습을 재현하게 되었다.
      이담로는 옥판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워 아홉 굽이 유상곡수를 만들고 정자를 앉혔는데, 꽃과 나무가 어우러지는 계곡에 눈이 머물다가 봉우리로 시선을 옮기며 경치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백운동 계곡은 강진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 등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일컬으며 조선중기 선비들의 은거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6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 직접 병풍바위에「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도솔암
      달마산 미황사의 열두 암자 중 한 곳으로 가장 정상부인 도솔봉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화엄조사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의 기도 도량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암릉으로 둘러싸인 도솔암은 4월에는 진달래, 5월에는 철쭉, 6월에는 원추리,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이 멋있어 많은 관광객이나 사진작가들이 찾는 명소이다. 달마산 도솔암 일원은 해남 8경 중 하나인 달마도솔로, 해남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해남 제1경이다. 정유재란 때 왜구들에 의해 소실되었으나 2002년 월정사 법조 스님에 의해 32일 만에 재건되었다.


      백련사(강진)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때 무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그 뒤 고려 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스님이 옛터에 중창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원묘국사의 백련결사는 120년간 고려 8분의 국사(원묘국사, 정명국사, 원환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를 배출하고 번청하였다.이후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왔을때 아암 혜장선사와 종교, 나이를 뛰어넘은 소통과 교류를 했던 공간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백련사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다. 사적비 옆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에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서 있는데 3,000여 평에 달하는 숲 안에는 고려, 조선시대의 부도 네기가 숨바꼭질하듯 흩어져 있다. 숲속은 사시사철 푸르고 두터운 잎으로 인해 대낮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11월부터 동백꽃이 피어서 만개하면 고즈넉한 숲은 붉게 물들어 감동을 안겨준다. 이 동백나무숲을 지나 다산초당 가는 산책길에는 백련사에서 재배하는 차밭과 야생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백련사가 있던 산은 고려시대 때부터 자생해온 이 야생차밭이 있어서 '다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때문에 정약용이 이곳에 유배와 지냈다는 의미로 '다산'이라는 호를 지어 대표적으로 사용했다. 또한 이곳은 아암 혜장스님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서로 유학과 불교를 주고 받으며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던 곳이다.


      땅끝관광지
      바다와 하늘이 만나 시작되는 ‘땅끝’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남으로 내달려와 마지막 용트림하며 멈춘 곳으로 한반도의 기가 가장 많이 뭉친 곳이기도 한 백두대간의 시작이요 끝이다. 그래서 땅끝은 가장 좋은 혈이 뭉친 곳이며, 그 기로 하늘 문을 여는 곳으로 많은 선인들과 예술인들이 신성한 제를 올리며 기를 받아가는 곳이라고 신성시 했다. 그래서 이곳에 서서 하늘과 바다를 향해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며 희망이 싹튼다는 이야기도 땅끝마을에 전해온다. 땅끝은 이러한 상징성으로 전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어 희망의 시작이며 국토순례의 시발지이다, 또한, 해양문화의 중요한 요충지이며 이동로이기도 하다.


      땅끝관광지
      바다와 하늘이 만나 시작되는 ‘땅끝’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남으로 내달려와 마지막 용트림하며 멈춘 곳으로 한반도의 기가 가장 많이 뭉친 곳이기도 한 백두대간의 시작이요 끝이다. 그래서 땅끝은 가장 좋은 혈이 뭉친 곳이며, 그 기로 하늘 문을 여는 곳으로 많은 선인들과 예술인들이 신성한 제를 올리며 기를 받아가는 곳이라고 신성시 했다. 그래서 이곳에 서서 하늘과 바다를 향해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며 희망이 싹튼다는 이야기도 땅끝마을에 전해온다. 땅끝은 이러한 상징성으로 전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어 희망의 시작이며 국토순례의 시발지이다, 또한, 해양문화의 중요한 요충지이며 이동로이기도 하다.


      강진만
      북쪽에 월출산, 남쪽에 구강포와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섬들과 갯벌, 그리고 산과 하천, 평야를 골고루 갖춘 강진 땅은 언제 보아도 수려하다. 강진읍을 지나 고금도가 건너다보이는 마량까지 강진만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는 23번 국도와 서쪽의 백련사와 다산초당,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바다갈대들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특히 다산초당 동암 바로 옆에 있는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구강포 앞 바다를 본 후 만덕산 허리춤을 가로지르는 산책길 같은 등산로를 따라가면 시야가 넓게 펼쳐지면 서구강포 너른 바다와 아랫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며 백련사에 닿는다. 이 곳 백련사는 해안가에 바짝 붙어 있는 절로 강화 정수사, 김제의 망해사처럼 바다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
      잔잔한 바닷물 너머로 건너편 도암면의 육지가 섬처럼 가물가물 이어지고 만안의 작은 섬들이 상록수에 덮여 동그란 바가지처럼 엎어져 있다. 만안의 바다 풍경은 정겹기만 하고 물이 빠지면 갯벌에 게나 짱뚱어 같은 것이 기어 다닌다.


      미황사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에, 우리나라 육지의 사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세워졌다. 불교가 한창 흥할 때는 불교의 요람이 되어 스님도 많았고 주위에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미황사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걸쳐 이 같은 융성을 거듭하다 100년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퇴락한지 100년이 흐른 후, 현재 미황사에 주석하고 있는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없이 비어 있던 미황사를 찾아 흔적만 남아 있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0여년 간 중창불사 원력을 세워 끊임 없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면모가 일신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대웅보전 (보물), 응진당 (보물)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체(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자하루(누각), 하심당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서해바다로 지는 화려한낙조와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미황사는 방문객들에게 늘 즐거운 풍경을 제공해준다. 우선 뒤편의 산자락과 잘 어울리는 위치에 알맞은 규모로 자리잡은 절터와 대웅보전의 앉음새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특히 대웅보전 주춧돌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거북, 게 등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으며, 가뭄이 들 때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 괘불(보물)과 대웅보전이나 웅진전 안 벽과 천장에 그려진 18세기의 벽화들, 응진전과 명부전 안에 모셔진 보살, 나한, 동자, 신장상 등 조각을 살피는 재미가 사뭇 크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긴 돌확이 있어 항시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그 앞을 가로질러 오른쪽 숲속으로 난 길을 들어서서 소나무와 동백나무 사이로 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부도 밭에 닿는다. 부도마다 거북, 게, 새, 연꽃, 도깨비 얼굴 등이 새겨져있어 한적한 산속에서 뜻밖에 꾸밈없는 표정들을 만날 수 있다. 절에서 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거리로 기암괴석이 들쭉 날쭉 장식하고 있어 거대한 수석을 세워 놓은 듯 수려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보는 다도해와 서해의 낙조는 매우아름다우며, 절 바로 아래에는 동백나무 동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 문화재 - 대웅전(보물), 응진당(보물), 괘불(보물)

      대웅보전은 미황사의 중심 전각이다. 한 가운데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아미타불, 악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1598년 중창하였고, 1660년, 1754년, 1982년, 2007년에 거듭 중수하였다.내부의 대들보와 천장은 산스크리트어 문자와 천불도로 장엄되어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인도의 아잔타 석굴 벽화, 중국 둔황막고굴의 천불벽화에 비견되어지기도 한다. 응진당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뛰어난 16분의 아라한들을 모신 전각이다. 응진(應眞)은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환히 깨닫고 해탈에 이른 이들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인 '아라한'의 한자어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대웅전과 함게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 벽면에는 수묵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가 있는데 선(禪)의 경지를 보여주는 유려한 선(線)맛으로 이름이 높다.


      백련사(강진)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때 무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그 뒤 고려 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스님이 옛터에 중창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원묘국사의 백련결사는 120년간 고려 8분의 국사(원묘국사, 정명국사, 원환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를 배출하고 번청하였다.이후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왔을때 아암 혜장선사와 종교, 나이를 뛰어넘은 소통과 교류를 했던 공간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백련사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다. 사적비 옆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에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서 있는데 3,000여 평에 달하는 숲 안에는 고려, 조선시대의 부도 네기가 숨바꼭질하듯 흩어져 있다. 숲속은 사시사철 푸르고 두터운 잎으로 인해 대낮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11월부터 동백꽃이 피어서 만개하면 고즈넉한 숲은 붉게 물들어 감동을 안겨준다. 이 동백나무숲을 지나 다산초당 가는 산책길에는 백련사에서 재배하는 차밭과 야생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백련사가 있던 산은 고려시대 때부터 자생해온 이 야생차밭이 있어서 '다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때문에 정약용이 이곳에 유배와 지냈다는 의미로 '다산'이라는 호를 지어 대표적으로 사용했다. 또한 이곳은 아암 혜장스님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서로 유학과 불교를 주고 받으며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던 곳이다.


    태그 #해남군 #힐링코스
    리뷰

    [ 정보출처 ]
    공공데이터포털
    한국관광공사